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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미국 디지털 달러, 어디까지 왔나
김세진
등록일: 2020-05-27  수정일: 2020-05-27


미국은 ‘중앙은행 발행 디지털 화폐(CBDC)’ 개발에 소극적이었다. 중국의 적극적인 CBDC 행보에 대응해 유럽 각국에서 관련 논의가 나왔을 때도 미국에선 유의미한 움직임이 없었고, 올해 2월 미국의 스티븐 므누신 미국 재무장관은 미 의회 상원 금융위원회에 출석해 “자신은 물론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Fed) 의장도 CBDC 발행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면서 “언젠가는 다시 생각해볼 수도 있다”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는 이 판도를 바꿔놓았다. 코로나19 지원금이 정치적 쟁점으로 부상하면서 중앙은행 발행 디지털 화폐(CBDC)가 공적자금 지급결제수단으로 공론화된 것이다. 


1. 코로나19 이전 미국의 CBDC


코로나19 이전, 세계 기축통화인 달러(USD)를 발행하는 미국은 CBDC를 주목하지 않았다. 미국의 중앙은행 격인 연방준비위원회(FED, 연준)는 2015년 FED 코인을 연구했지만 별다른 성과발표 없이 2018년 폐기했다. 소극적인 정부와 중앙은행을 자극한 것은 페이스북이 추진하는 리브라(Libra)와 크리스토퍼 지안카를로 전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회장이 이끄는 민간 싱크탱크 '디지털 달러 프로젝트(DDP)'였다. 


2019년 6월 페이스북이 발표한 암호화폐 리브라는 민간 기업이 예금 기반으로 발행한 파생통화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본원통화(M0)인 CBDC와는 큰 차이가 있다. 본원통화는 중앙은행이 발행한 현금과 시중은행이 중앙은행에 예치한 지급준비금을 합한 금액이며, CBDC는 여기서 중앙은행 발행 현금 중 일부를 디지털화한, 일종의 디지털현금이다. 리브라는 본원통화가 예금, 대출을 반복하는 신용창조 과정을 통해 부풀어오른 파생통화에 속한다. 이처럼 리브라는 CBDC와 큰 차이가 있었지만 역설적으로 미국 관료들에게 디지털 화폐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기에는 충분했다. 


리브라는 달러뿐만 아니라 복수의 법정화폐 가치를 따라 변동하는 독립적인 통화를 표방했고, 미국 정부는 이를 현 달러 중심의 통화체제를 흔들 ‘적’으로 인식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그해 7월 “비트코인과 다른 암호화폐는 돈이 아니고 허공에 토대를 두고 있다”면서 “페이스북 리브라의 가상통화도 위상이나 신뢰성이 없다”고 비판했다. 10월 미국 의회 청문회에서 하원 금융서비스위원회 소속 의원들은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대표를 소환해 개인정보보호, 법적 책임 문제 등을 거론하며 디지털 화폐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해나갔다. 


그러자 2020년 1월 크리스토퍼 지안카를로 전 CFTC 회장을 주축으로 설립된 DDP가 페이스북 리브라에 맞서 미국 정부에 CBDC 발행을 제안한다. 그들이 구상한 디지털 달러는 연준이 직접 발행하는 달러 연동 디지털 화폐다. 현금처럼 연준이 은행에게, 은행이 민간인에게 발행하는 구조다. 소매와 도매, 초국경, 개인간(P2P) 결제를 지원하고, 법률과 정부의 이해관계에 따른 제한된 익명성을 가지며, 미국 달러의 발행 및 유통에 관한 규정을 적용해 법적 보호를 받는 점을 특징으로 한다. 이를 구축하기 위해 블록체인, 분산원장(DLT) 등 다양한 기술 적용을 제안했다. 


△ [출처: 디지털 달러 프로젝트(DDP) 홈페이지]


미국의 행정부와 입법부가 리브라에 보인 부정적인 태도와 DDP의 출현 이면에는 리브라,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 및 디지털화폐가 법정화폐이자 세계 기축통화인 달러화의 지위를 실제적으로 위협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있다. 


2. CBDC, 공적자금 지급수단으로 부상하다


이처럼 CBDC에 대해 소극적이었던 미국 행정부와 입법부를 바꾼 것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다. 코로나19 사태로 경기부양책이 정치적 쟁점으로 떠오르자 미국 정부는 더 이상 디지털 화폐에 대해 ‘신중하게’만 접근할 수 없게 됐다. 코로나19 공적자금을 국민들에게 지급하는 과정에서 지급이 누락되거나 지연되는 일이 발생하자 입법부를 중심으로 CBDC가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할 공적자금 지급결제수단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 같은 목소리는 하원 초당파 의원들을 중심으로 공화당과 민주당에서 모두 나온다는 점이 눈에 띈다. 


미국 민주당 측이 3월 24일 하원에 제출한 2조2000억원(한화 약 2700조원) 규모의 코로나19 긴급 지원법안 초안에 따르면 디지털 달러를 이용해 연간 소득 7만5000달러 이하의 미국 성인 1명당 1500달러의 구호금을 제공하는 방안이 포함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법안에 따르면 연준이 국민 개인별 디지털 지갑에 구호금을 디지털 달러로 직접 지급하는 형식이다. 최종안에서는 디지털 달러 조항이 삭제됐지만 CBDC가 공적자금 지급수단으로 제시된 유의미한 사례다. 공화당 6명, 민주당 5명 등으로 이뤄진 초당파 의원 11명은 4월 23일 재무부 장관에게 구제금융을 분배하고 추적하기 위해 재무부가 혁신적인 블록체인 기반 지급 시스템을 활용하도록 독려하는 서한을 제출하기도 했다. 


공화당과 행정부에서도 디지털 달러가 언급됐다. 대표적인 초당파 의원인 맥신 워터스 미국 의회 하원 재정서비스위원회 의장은 3월 23일 발의한 법안에서 연준이 코로나 부양자금을 배분하는 방식으로 ‘디지털 달러’를 만들고, 연방준비제도(Fed)와 연결된 은행이 유지 관리하는 ‘디지털 달러 지갑’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 4월 16일 라시다 틀렙 국무총리가 재무부 장관에게 제출한 코로나 관련 직불카드 결제 시스템 제안서에는 디지털 달러와 디지털 달러 지갑 항목이 포함됐다. 


△ 미국 초당파 의원 11명이 제출한 서한 중 일부 발췌 [출처: 블룸버그]


CBDC는 중앙은행이 발행하기 때문에 보조금 지급이나 세금 징수, 발행량 관리, 사용처 추적 등 통화관리에 이점이 있다고 평가받는다. 코로나19로 인해 미국 정부는 직접 국민에게 대규모 공적자금을 지급하는 경험을 했고, 이 과정에서 CBDC를 지급결제수단으로 주목하게 됐다. 


3. 다급해진 官의 시나리오, 리브라 활용과 CBDC 개발


코로나19와 공적자금 지급으로 인해 미국 정부는 CBDC를 마주하게 됐다. 하지만 미국이 CBDC 테스트 단계에 들어선 중국의 수준으로 구축하려면 수년이 소요될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미국 정부가 CBDC를 자체 개발하는 과정에서 리브라를 개발수단 혹은 달러 국제결제 확산에 활용하거나, 우선 결제시스템 단에서 디지털화를 추진할 가능성이 나온다. 


야오첸(姚前) 중국 증권감독위원회 과학기술감독국 국장은 디지털 달러1.0과 리브라2.0의 결합 가능성을 제시했다. 리브라는 민간 기업 프로젝트로 달러에 대한 반발이 심한 국가에도 보급하기 유리한 포지션이다. 미국이 민간 통화 포지션을 점한 리브라를 이용해 해외 달러결제를 확산하거나 혹은 서비스형 블록체인(BaaS)으로서 리브라를 이용해 디지털 달러를 발행할 수도 있다는 시각이다. 


이 같은 주장은 리브라가 최근 2.0 백서를 발표하면서 맞이한 변화와도 맞물린다. 페이스북은 작년 7월 출시발표 시 법정통화를 대체한다는 점에서 미국 정부의 우려를 샀다. 그러자 리브라는 언제 발표한 2.0 백서에서 기존 ‘국경 없는 통화’라는 단어를 삭제하고, ‘전세계 결제시스템’이라는 용어를 도입했으며 기존 복수의 통화바스켓 체제에서 단일통화에 가치가 연동된 체제를 택했다. 법정통화 대체를 포기하고 법정통화를 보조하는 결제수단으로 선회한 것이다. 자체 가치측정 기능을 상실한 채 법정화폐의 그림자 통화로서 역할을 축소한 리브라는 이제 미국 달러결제를 확산하고 CBDC를 발행할 시간을 벌 좋은 도구가 된 셈이다. 


미국이 현 결제 시스템을 정비한 후 단계적으로 CBDC 개발로 나아갈 가능성도 있다. 제롬파월 연준 의장은 지난 2월 하원 금융서비스위원회에 제출한 논평에서 "디지털 통화 수용을 검토하고 있다"고 발언했고, 레얼 브레이나드 연준 이사는 지급결제 심포지엄에서 “연준은 페드나우(Fed now)를 개발하면서 이와 관련해 200개 의견서를 검토하고 있다”면서 "분산원장기술과 CBDC를 포함한 디지털화폐 활용방안 연구와 실험도 진행 중"이라고 전했다. 


브레이나드 이사의 논평에서는 페드나우 개발 계획에 이어 리브라로 디지털 화폐 주목현상과 CBDC 개발 계획이 연이어 언급됐다. 미국이 향후 CBDC 개발을 단계적으로 진행할 수 있음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페드나우는 연준이 2023~2024년 구축을 목표로 하는 실시간 총액결제방식(RTGS) 소액결제 시스템이다. 현재 미국 거액 및 소액결제는 연준을 비롯해 지정청산기구(TCH) 등 민간기관이 각자의 시스템으로 운영하고 있는데 연준은 페드나우를 통해 이를 통합, 감시기능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한국은행은 2월 자료에서 페드나우의 시사점으로 “페이스북 리브라 발행계획 발표를 계기로 국제기구 등에서 논의되고 있는 국가간 지급결제시스템 연계 가능성에 대비한다”는 점을 꼽기도 했다. 김보영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원은 25일 보고서에서 “미 연준은 그동안 CBDC 발행의 필요성이 없다는 입장을 지속적으로 표명했으나 최근에는 기술, 발행 및 감독, 정책개발 등 폭넓은 연구를 진행한다고 밝혔다”면서 “실물화폐의 보조적 수단으로 CBDC 발행이 빨라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진단했다. 


[김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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