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중국이 디지털 위안을 출시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그간 논의의 영역에 국한되었던 CBDC(Central Bank Digital Currency·중앙은행 디지털 화폐)가 본격적으로 우리 삶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스웨덴, 영국, 호주, 브라질 등 여러 다른 나라들도 이미 CBDC 도입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아직 초기 단계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또한 CBDC에 대한 연구와 실험을 진행하며 다가올 CBDC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CBDC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냐
사실 CBDC에 대한 논의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80년대부터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에 대한 논의가 존재했으며 인터넷 혁명 이후 정보통신기술이 발달하면서 사용과 보관이 보다 편리한 전자화폐를 중앙은행 차원에서 도입하자는 논의가 이어져왔다.
최근 CBDC가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블록체인 기술의 등장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크게 보면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블록체인의 기술적 특성이 CBDC에 잘 맞는다는 점이다. 블록체인의 높은 보안성과 안전성 그리고 무결성은 CBDC가 안정적으로 운영되기 위해 꼭 필요로 하는 특징들이다.
그러나 또 다른 이유도 존재한다.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한 수많은 암호자산이 등장하면서 법정화폐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비트코인과 같은 분권화된 암호자산뿐 아니라 테더나 리브라와 같이 법정화폐의 역할을 대체하려고 하는 스테이블 코인들이 점차 확산되면서 법정화폐도 혁신이 없으면 자칫 도태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었고 결과적으로 CBDC에 대한 논의를 촉진한 것이다.
하지만 사용자 입장에서 보면 CBDC가 그리 혁신적이지만은 않다. 최근 논의가 되고 있는 CBDC의 두드러진 차이점은 블록체인 기술을 사용했다는 것 정도이다. 사용자 입장에서는 어차피 같은 전자화폐일 뿐이며, 이미 우리는 자연스럽게 전자화폐를 사용하고 있다. 월급을 현금으로 받는 것보다는 월급날 통장 잔고가 늘어나는 것에 익숙하고, 가게에서 종이지폐를 사용하기보다는 신용카드나 각종 페이먼트 서비스를 더 자주 쓰고 있다. 이미 우리는 충분히 혁신적인 사회에 살고 있기에 단순히 블록체인을 쓴다고 해서 CBDC가 혁신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블록체인 기술이 가지고 있는 불편함이 더 드러날 수도 있다. 따라서 CBDC가 진정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블록체인 기술을 쓰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디지털 원 성공하려면 블록체인 장점 잘 살려야
CBDC가 활용할 수 있는 블록체인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다양하다. 그러나 모든 장점이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니다. 블록체인의 투명성이나 높은 수준의 분권화는 CBDC에 득보다는 실이 더 많을 것이다. 만약 이웃과 친구들이 내 거래내역을 실시간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면, 또는 보이스피싱을 당했는데 은행에서 자금동결이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분명 끔찍한 경험이 될 것이다.
한편 CBDC에 아주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지역과 국경을 넘어서는 특성이다. 이를 영어로는 보통 보더리스(borderless)라고 한다. 블록체인 토큰은 인터넷 네트워크를 타고 돌아다니기 때문에 인터넷이 되는 곳이면 어디든 이동하고 사용될 수 있다. 인터넷에 국경이 없듯 블록체인에도 국경이 없는 것이다.
이 장점을 잘 활용하여 CBDC가 사용되는 범위를 우리나라로만 한정하지 않고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의 CBDC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세계 어디에 있든지 블록체인 네트워크를 타고 빠르고 쉽고 안전하게 CBDC를 갖고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같은 작은 나라의 화폐를 필요로 하는 곳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경제력은 비록 세계 선두는 아닐지라도 문화에 있어서는 이미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 이 문화의 힘이 우리 CBDC의 근간이 되어야 한다. 수년 전 한 기사에서 한류 드라마에 나오는 코트를 직구하고 싶은 외국인들이 공인인증서에 막혀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CBDC가 적용된다면 바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한국에 여행을 오는 관광객들도 CBDC를 사용하면 훨씬 편리하게 여행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CBDC를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그 수요층을 국내가 아닌 전 세계로 상정하고 설계를 진행해야 할 것이다.
기존 정부 블록체인 프로젝트와도 연계해야
물론 CBDC는 국내에서도 큰 의미를 갖는다. 흩어진 블록체인 프로젝트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고리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정부의 수많은 블록체인 시범사업들은 서로 고립된 상태로 진행되고 있다. 어떤 프로젝트는 심지어 사업을 시행할 때마다 다른 블록체인을 사용해서 과거와 현재의 블록체인마저 연결되지 못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렇게 중구난방식으로 진행되는 정부 시범사업을 CBDC가 하나로 묶어주어야 한다. 이들 사업에서 사용되는 모든 경제단위를 CBDC로 통일하고, 사업을 제안할 때 CBDC 네트워크가 연결되는 것을 필수 조건으로 내거는 방식을 고려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다양한 사업들이 CBDC를 통해 연결되고 사업 내부에서만 흐르던 가치가 다른 사업과 통하기 시작하면서 더 큰 공공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조금만 더 상상력을 더하자면 CBDC와 함께 DID를 연결하여 국가나 도시 차원의 블록체인을 구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공공영역 블록체인에 대한 논의는 아직 우리나라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지는 않지만 향후 블록체인 산업이 발전하면서 자연스럽게 논의가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이고 중지를 모아 이에 대한 연구를 적극적으로 진행한다면 향후 스마트도시나 스마트정부가 발전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퍼블릭 블록체인까지 연결한다면 ‘최상’
아직은 조심스럽지만 마지막으로 제안하고 싶은 것은 퍼블릭 블록체인과의 연계다. 즉, 스테이블 코인의 형태로 CBDC가 이더리움과 같은 퍼블릭 블록체인 플랫폼에서 돌아다닐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블록체인에서 대부분의 혁신은 퍼블릭 블록체인에서 일어난다. 전 세계의 수많은 인재들과 자금이 모여들어 혁신을 일으키는 공간인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CBDC를 연결한다면 이러한 혁신이 창출하는 가치가 직간접적으로 우리 사회로 흘러들어오게 될 것이다. 물론 퍼블릭 블록체인이 통제가 어렵고 혁신이 많은 만큼 사기도 많다는 점은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도전은 아직 어떤 나라도 천명한 적이 없다. 우리나라가 더 적극적이고 뜨거운 논의를 거쳐 현명한 방안을 마련한다면 블록체인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을 것이다.
성급한 도입보다 깊은 논의 필요
각국이 CBDC를 앞다투어 도입하려 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도 바쁘게 CBDC를 도입하려고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정말 필요한 것은 성급한 설계와 도입이 아니다. 정말 블록체인을 이해하고 있고, 그 기술적·사회적 잠재력과 한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전문가들과 국가의 정책과 비전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과 이를 실제로 사용할 시민들이 모여 CBDC를 놓고 이것이 우리나라와 시민들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려면 어떻게 설계되어야 할지 연구하고, 논의하고, 토론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코로나19에 대한 대응을 거치며 선진시민을 가진 선진국임을 증명했다. 이와 동일한 동력이 CBDC를 만드는 데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외국을 벤치마킹하기보단 외국이 우리를 벤치마킹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지금 블록체인의 다른 영역은 많이 뒤처진 상황이지만 CBDC는 앞서서 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
[조재우 한성대학교 교수]
조재우 교수는 한성대학교 사회과학부 스마트도시계획/환경비즈니스 트랙 조교수로 스팀잇을 움직이는 20명의 증인 중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선출된 것으로 유명하다. 석사는 서울대 환경대학원에서, 박사는 UC 얼바인(Irvine)에서 도시계획을 전공했으며 유학 도중인 2013년부터 블록체인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현재도 스팀잇에서 증인으로 활동 중이며 카카오벤처스에 블록체인의 토큰 이코노미 등과 관련한 자문을 제공하고 있다. 칼럼에서는 주로 블록체인 산업 또는 정책 발전방안을 논할 예정이다.